즐거운 인생

 

메일 뒤지다가 레포트로 쓴 감상문을 발견했다. 레포트라지만 즐거운 마음으로 썼다.

수업은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에이포 3쪽 가량 쓰고, 다음 시간에 모여서 얘기하는 거였다.

대학 와서 제대로 된 수업이 없었노라고 아니 제대로 들은 수업이 없었다고 대학은

안 가는 게 낫다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김인식 선생님의 영화수업은 문예창작 수업과

함께 기억에 남는 강의다. 영화강의는 2002년에 들은 것.

 

나중에 수업 들을 때 찾아보니 김인식 선생님 수업이 없더라. 복학하면 또 찾아봐야지.

즐거운 인생 등 수업시간에 본 모든 영화가 기억에 남는다.

<녹색광선> <토토의 천국> <쉘부르의 우산>

네 편인데도 진짜 알차구...

 

수업 끝나고 선생님한테 많은 것을 배웠다고 메일을 보냈는데 선생님 답장에

 

강의가 재미있었고 또 많이 배웠다니 다행이구나!

그런데 홍상수가 에릭 로메르 베꼈다는 사실이 배움이라고 하기는 좀...흠흠 --;;;

 

ㅋ 이런 말이 써있었다. 그밖에도 토토의 천국은 <씨네마 천국>의 성공을 부러워-_-해서

이름도 따라하고 제목도 짝퉁이 되었지만 내용은 별로 상관없다는 것-ㅅ+;

EBS 영화 트는 애들-_-; 수준이 낮다는 것(녹색광선에서 주인공 가슴노출 장면이 전혀

야한 맥락이 아니고 그냥 해변이었는데 짤랐다고 분개하시면서 원본을 보여주셨었다)

까이에 뒤 씨네마의 위대함;;이나 그 잡지가 배출한 무서운 작가들, 앙드레 바쟁 이야기

와 그때까지 프랑스영화는 나쁜피 보다가 졸은 기억밖에 없던 내게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었었다.

 

어려운 말을 쓰지도 않으시고... 자유롭게 마구 날리시던 그 독설들 ㅋ 독설 너무 조아

 

이런 흐뭇한 생각들을 하며 내가 쓴 걸 읽는데 귀엽구만, 그렇게 보려고 했지만 짜증나-_-

어쩜 이렇게 나는 시시각각 변한다냐. 몇 년만 있으면 또 이거 보면서 짜증내겠지...-ㅅ-

그러나 중간에 '허무'라는 단어로 표현한 부조리에 대한 나의 직시-_-가 지금 관심사랑

맞닿아 있어서 내비둔다.

 

참 레포트제출용이기도 했지만 예전엔 열심히 길게 썼는데, 영화 재미있게 봤다면

열심히 감상문 쓰는 게 영화에 대해 경의를 표하는 자세가 아니겄는가.

오히려 헐리우드 영화에 빠져 살던 중딩 때는 영화를 반드시 두 번 보는 훌륭한-_- 습관을

갖구 있었는데 늙으면서 참말로...

 

큭 한밤중에 녹색광선 보고 쓴 것도 읽었는데 더욱 가관이다. 푸헉... 잊혀진 세월이다-_-;



 

즐거운 인생



선생님께서 영역해 주신 제목, [The Things in life]. 영화의 원제와 우리 나라에서 붙인 제목 <즐거운 인생>에 대해 차례로 생각해 보는 것으로 글을 시작하려 한다.(불어를 몰라서 이하에서는 그냥 이 제목을 원제로 의제하겠습니다.)

영화에서 주인공 남자의 삶에는 무엇무엇이 있었나. 이혼한 아내가 있었고, 그 사이에 아들이 있었으며 사랑하는 사람이 있고, 아버지가 있고, 친구가 있고 일이 있었다. 나는 그의 인생에 무엇이 있었나 그를 정점에 놓고 도식화해 보았다. 그리고 놀라고 말았다. 내 인생에도 역시-물론 아직 결혼을 안 했고 나에겐 언니도 있지만- 그의 인생에 있었던 것들, 말하자면 그가 맺고 있던 관계들이 있는 것이다. 세부적인 차이점을 무시한다면 우리 인간이 맺고 살아가는 관계들은 모두 동일하고 그것에 ‘인생’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다는 것, 즉 우리들의 인생이란 것은 타인과의 관계라는-그리고 모두 동일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원제목의 ‘The Things'란 구체적으로 ‘관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관계의 대상이 굳이 인간에 한정될 필요는 없지만 우리가 대표적으로 뽑을 수 있는 사물인 돈이라든가 술은 인간 사이의 부산물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나는 인간 사이의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이미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란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개인의 내면 세계를 탐구한다는 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읽어도, 개인이 홀로 존재하고 내면 세계에만 파묻히기보다 끊임없이 타자와, 사회와 갈등하는 모습이 엿보인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 얘기보다, ‘인생의 여러 가지 것들’이란 제목을 걸고 만든 영화에서 본 우리의 인생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여도 충격으로 다가온다.

그렇다면 <즐거운 인생>이란 어떤 의미로 붙여진 제목일까. 영화를 보기 전에 제목만 봤을 때는 아름다운 삶의 진솔한(이런...) 얘기이든지 아니면 냉소적인 의미로 반어적으로 쓰인 뜻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영화의 오프닝부터 보여준 교통사고 장면. 나는 이 사고를 보고는 섣부르게도 후자가 맞았구나 했다. 그런데 무엇일까. 영화는 당황스럽게도 아름답고 감동적인 역전의 드라마도 아니었고 비비꼬아 늘어뜨린 조소도 아닌, 어떤 남자의 인생의 어떤 시점에서부터 그가 죽는 상황까지 보여 준 다큐멘터리 영화 같았다. 다만 영화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지 않은 이유는 영화의 편집기술 때문이었다. 중간중간 삽입된 교통사고의 장면들. 교통사고의 장면들은 느리게 처리되었지만 외려 남자의 일상에 묻혀 버릴 뻔한 나를 긴장시켰다. 어느 시점에서 남자의 얼굴이 보였을 때는 경악할 뻔했다. 도대체 뭐가 즐거운 인생이라는 건지!

굳이 천수를 누리고 이루고자 하는 일을 다 이루지 못 하였어도, 한 세상 태어나 살다가 죽는 것이 행복하다는 의미였을까? 그러므로 제목은 남자 주인공만의 인생이 아닌 우리 모두의 인생, 인생 자체의 즐거움을 노래한 걸까? 그렇다면 비록 애인인 여주인공은 결혼할 뻔한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지만, 물론 그 자체는 슬픈 일이지만, 남자 없는 인생에 적응할 것이고 살아갈 것이고 역시 즐거운 삶을 살게 되리라. 그리고 청혼을 받는 날이었다는 약간은 끔찍하고 고통스럽지만 애틋한 추억을 갖고 살겠지. 그를 위해 전부인은 헤어지자는 내용의 편지를 찢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영화를 재미있게 봤다니까 선배 언니가 무슨 내용이냐고 물었다. 나는 스토리를 요약했다.

“남자 주인공이 이혼하고 애인이랑 사는데 헤어지려다가 결혼하려고 마음먹었지만 자동차 사고로 죽는 얘기예요. 어, 이렇게 말하니까 이상하네.”

대체로 소설이나 영화의 내용을 요약하면 어떤 비슷한 요소들을 찾아낼 수 있다. 모든 단순화된 줄거리들은 시시한 연애담이기 일쑤다.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그러하고 ‘위대한 개츠비’가 그러했다. 그런데 같은 이야기를 다루더라도 모두 다른 작품이 나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작가의 대상에 대한 관점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표현 스타일이 다르기 때문이다. 접근 방식도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일이니 만큼 많은 문학 작품, 영화, 음악, 그림 등이 ‘인생’을 다루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이미 새로운 것은 없다”고 단언했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이란 주제를 놓을 수 없는 것은 어떤 작품을 보아도 완벽히 내 인생은, 내가 보는 ‘인생’은 아니기 때문인 것 같다. 자기를 탐구하려는 마음이 인생이란 소재를 탐구하게 만든 것이 아닌지. 혹자는 ‘어, 저건 완벽한 내 얘기야’라 할 것이고, 혹자는 ‘에이, 저런 게 어딨어’할 수도 있다. 후자 중 ‘나의 인생관’을 피력하고 싶은 자가 창조력을 발산하는 것일 게다.

그런데 이 영화는 어떤가. 나는 작품에 작가를 연관지어 생각하는 쪽인데 내가 쓰는 글이나 행동이 내 생각을 담아내고 있어 작가의 사상이 반영되지 않은 작품이 있을까 의아스럽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얘기는 차치하고 <즐거운 인생>이라는 영화의 감독 끌로드 소떼의 인생관을 영화에서 엿볼 수 있지 않은가 한다. 내가 느끼기에 감독은 냉정한 사람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을 가차없이 깨 버린다. 남자 주인공은 갈등 끝에 애인과 결혼하여 행복한 삶을 살았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 우유부단함으로 말미암아 결혼 생활이 순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인생은 아름다울 수도 있고 장밋빛일 수도 있고, 또한 잔혹할 수도 있다. 그런데 감독은 남자 주인공을 죽여 버림으로써 모든 가능성을 차단했다. 솔직히 결혼 생활을 냉담하게 비춰 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은 이유를 나는 모르겠다. 혹시 그러한 얘기들은 이미 많이 다루어졌고, 감독이 보는 인생은 예측을 불허하는 면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

사실 신일숙이란 만화가가 말했듯이 ‘인생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삶은 그 의미를 가진다’. 그 의미라는 것이 꼭 유리한 쪽이 될 필요 없이 우리네 인생이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서’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닌가 싶다. 미래가 확실하다면 아무도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이런 불확실성 때문에 때로 사기점이 판을 치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데 남자의 죽음을 예측할 수 없었던가? 적어도 관객은 남자의 운명을 애초에 보았고, 삽입된 교통사고의 장면들로 인해 남자가 죽을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같지만 그 편집기술 때문에 남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고 위에서 언급했는데 결과를 전제로 깔고 시작하는 영화는, 그리고 중간 삽입된 결과들은(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의 과정이 될 수도 있지만) 작가의 의도된 아이러니를 읽게 한다. 결국 작가는 무엇을 말하려고 했던 걸까.

나는 여기서 잠깐 내 인생을 반추해 보고 싶다. (이부분 결국 생략 존재 자체만으로 진짜 짜증나는구마잉) 

내가 결과적으로 어떤 사람인가를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어떤 삶을 살아서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 사람들은 궁금해 할 게다. 책을 쓸 때나 영화를 만들 때나 결과부터 보여주는 것은 꽤나 위험해서 작품에 자신 있는 사람들이 보통 결과를 보여 주고 과정을 서술하는 방식을 택한다고들 한다. 결과를 보고 어떻게 저런 결과가 나왔는가 하는 것이 사람들이 주된 관심사가 될 텐데 대개의 영화가 인과응보적이라 ‘아하, 그래서 저렇게 됐구나’하고 깨닫게 되거나 ‘너무 뻔한 거 아냐’하고 화를 내게 된다. 그런데 <즐거운 인생>은 그 내용과는 이질적이어서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 준다. 교통사고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영화에서의 교통사고는 어떠한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지도 않고 필연적 결과도 아니다. 감독이 말하고 싶은 인생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허무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어떤 감동을 주는 것은 아닌, ‘인생이란 그저 이런 거야’.

나는 주인공의 인생 자체에 감동을 받진 못 했지만 내가 이해한 감독의 메시지는 깊게 공감하고 많이 생각해 보았다. 인간이므로 공유하는 인생, 그 인생의 요소들도 공유하는 인간. 그리고 죽음이라는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지만 모두에게 다른 결과. 그 결과의 예측불가능성.

너무 남자의 인생에만 초점을 맞춰 여주인공의 생애가 매몰된 듯 느껴진다. 다만 여자의 인생이든, 남자의 인생이든, 인간의 삶이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남자가 죽는 장면은 실제로 겪어보고 싶을 만큼 흥미로웠다. 특히 결혼과 죽음이 공존하던 테이블은 현실적인 감독이 환상적으로 처리한 유일한 장면이었다. 죽음으로써 현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기 때문일까. 이런 생각들을 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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