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들Faces, 1968

category 영화나 드라마 2006/10/26 14:35



이 영화 이거 뭡니까...

미치겠다

 

이거 뭐야미거워먀 이거뭐야

 

(기사 링크를 걸었으나 잘 안 돼서 밑에 계속보기로 퍼와 버렸다↓↓↓) 

 

위에 글에 내가 하고 싶은 얘기 다 있다. 근데 필름2.0은 제발... 싸이트에서 기사검색 좀 가능하게 해달라구읏!!

저 기사를 읽으며 맞아!마자아1 소리질렀다. 나 영화 보면서 안절부절 불편했다고ㅠㅜ 이런 불편함은 처음이야아아

물론 21세기를 사는 나이기에 조금씩 차용한 작품들을 많이도 보았건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래 ㅇ<-< 역시 오리지날은 다르다?

 

지금 살아있는 사람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까? 있으면 내가  평생 쫓아 다닌다ㅜㅡ

 

너무 멋있어ㅠㅜ 미치겠어 최고야ㅠㅜ 우우

 

근데 나 저번에 존 카사베츠가 출연했던 <살인청부업자>가 카사베츠가 감독한 건 줄 알고 영화가 많이 변했네? 뭐가 먼전지 몰라도.. 이러면서 봤는데 역시 전혀 아니었다; 나 뭐야 돈 시겔 영화라고 떡하니 적어놓고.

 

그리고 저 기사에 내용중에 이 훌륭한 감독이 말한 걸 보고 충격받은 게 있는데 이 사람이 글쎄ㅜㅡ 이사람 영화는 감독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진짜 특이한 감독이야ㅠㅜ 당신 너무 멋있잖아 잉잉 평생 추종해 버릴테닷 영화를 함께 찍은 배우들 스텝들, 그들을 빼고 찬사가 나한테만 오는 게 싫다고 한다.

 

ㅠㅜ 아오 이런 사람 세상에 또 있어? 영화적 내러티브 완죤 무시하고 정말 영화 기존 문법 정말 전혀 의식하지 않고 완죤 자유롭게 미세감정 포착해대는 사람 ㅠㅜ 배우와 스텝과 카메라와 함께 작업하는 사람 ㅜㅡ 이건 자율성을 인정하는 정도의 영역이 아니다. 이런 사람 다시 없어 ㅇ<-< 사랑해!!!!

 

에 그리고 별도로 이 영화에서 저 포스터 여자의 시선이 카메라의 시선으로 바뀌는 지점이랑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는 여자의 시선이랑 ㅠㅜ 눈을 뗄 수가 없어서 마구 캡쳐했다. 혼자 영원히 봐야지 ㅇ<-<

 

정면을 응시하는 건 여자의 내면을 한 번 보여주는 순간이었을까? 관객의 혼란을 더해주는 거였을까? 즉흥 연기였을까? 그... 뭔가 화면으로부터 멀어지는 그런 기분.. 그건 도망가고 싶은 걸까? 나의 혼란 나도 모르겠다. 참 좋다랄밖에,,,



 


 
[필름 2.0 2003-07-12 23:40] 
 

 

미국 독립 영화계의 전설적 인물 존 카사베츠는 평생 비타협적으로, 영화를 모방하는 영화가 아닌 삶을 모방하는 영화를 만들었다. 그의 영화는 다수에 환영받진 못했으나 그의 영화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그의 작품은 삶에 관한 모방이 아니라 삶 그 자체로 느껴졌다. 도달하기 힘든 생생함으로 현실을 접수했던 특이 체질 감독의 일대기.

 

1970년 무렵 아직 감독 지망생이었던 마틴 스콜세지는 전설적인 록 다큐멘터리 <우드스톡>의 편집자로 일했다. 스콜세지는 그 필름을 존경하는 선배 감독 존 카사베츠에게 보여줬다. 카사베츠는 그 당시에 이미 가장 비타협적이고 독창적인 뉴욕의 독립 영화감독으로 이름이 나 있었다. 카사베츠는 스콜세지가 편집한 필름 분량을 보고 말했다. “좋은데. 이제 자네 영화를 찍도록 노력해 봐. 할 수 있을 거야”라고 충고했다. 영화계에 어떻게든 감독으로 자리잡으려 애쓰던 스콜세지는 로저 코먼이 제작한 <바바라 허시의 공황시대>를 연출했다. 대공황기를 무대로 미국 시골 지방에서의 폭력과 섹스에 관해 묘사한 작품이었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꾀하는 구원을 다룬 스콜세지의 강박적인 주제 의식이 담겨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으로 섹스와 폭력을 볼거리 삼아 메시지를 전하는 로저 코먼식 저예산 영화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었다. 스콜세지는 다시 카사베츠를 찾았다. 장사꾼의 영화를 만들었다며 은근히 켕겼던 스콜세지에게 카사베츠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다고 칭찬했다. “자네 색깔이 분명히 보이는군. 이제 자네 얘기를 영화로 찍도록 해. 불가능이란 없어. 무조건 시작하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네. 만들면 되는 거야.” 카사베츠의 격려에 힘을 얻은 스콜세지는 그의 초기 대표작 <비열한 거리>를 뉴욕에서 개인적 영화 제작 방식으로 찍었다.


스콜세지가 자리를 잡기 오래전부터 카사베츠는 이미 그런 식으로 영화를 찍고 있었다. 할리우드 메이저 스튜디오와 타협하지 않았던 그는 배우로 일해 번 돈으로 영화를 만들었으며 평단과 대중의 외면에도 불구하고 줄기차게 자신만의 영화를 찍었다. 1989년 그가 사망했을 때 대다수 언론은 그를 감독 겸 배우가 아니라 배우에 방점을 찍어 소개했다. 카사베츠는 로버트 알드리치의 <더티 더즌>, 로만 폴란스키의 <악마의 씨>, 브라이언 드 팔마의 <퓨리> 등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보인 배우로 알려져 있었다. 정작 그가 연출한 영화는 대중뿐만 아니라 미국 평단에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유럽에서만 인정받은 그의 영화는 어떤 영화적 규범에도 들어맞지 않았다. 카사베츠는 늘 자기만의 영화를 창조했다. 그는 실제 삶에서 가장 미세한 순간을 극적 구도에 맞춰 우겨넣지 않고 연출했다. 그의 영화는 정리되지 앟고 거칠었으며, 정의할 수 없는 기이한 삶의 순간들을 담아냈다. 게릴라식으로 힘들게 찍는 그의 대다수 영화에 배우들은 곧잘 무보수로 출연했다. 그렇게 힘들게 영화를 찍으면서 카사베츠는 자기만의 성채를 쌓은 것이다.

 

 

가공되지 않은 경험

 

뉴욕 토박이였던 존 카사베츠는 1950년대 막 황금기를 맞이한 TV에서 배우로 활동하며 유명해졌다. 1953년에서 1956년까지 80편 이상의 TV 드라마에 출연한 그는 <한밤중의 테러>나 <거리의 살인> 등의 드라마 각본을 쓰기도 했다. 비교적 빨리 출세한 카사베츠는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했다. 자신이 맡는 배역이 거짓되고 신파적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하게 혐오감을 나타내기도 했다. 1957년 마틴 리트의 영화 <도시의 가장자리>에 출연했던 카사베츠는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홍보차 나간 자리에서 그 영화가 그리 대단한 영화가 아니며 자신은 더 나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해 물의를 일으켰다. 더 놀라운 일은 카사베츠의 과장 섞인 허풍에 청취자들이 반응했다는 것이었다. 카사베츠는 라디오 방송에서 과장된 어투로 청취자들이 1달러씩 보내준다면 ‘진짜 인간’을 담은 영화를 만들겠다고 공언했다. 며칠 안에 청취자들로부터 약 2천 달러에 달하는 지폐와 동전이 방송국에 성금으로 답지됐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이 카사베츠의 데뷔작 <그림자들>이다. “영화 제작에서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실수를 다 저지른 작품”이라고 훗날 카사베츠 스스로 회고한 <그림자들>은 기껏 영화를 찍고 오면 사운드가 녹음되지 않는 따위의 숱한 해프닝을 겪으며 완성됐다. 카사베츠는 그렇게 영화 제작 기술의 기초를 배우며 <그림자들>을 연출했다. 이 영화의 기술적 완성도는 서툴렀지만 카사베츠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텔레비전 생방송 드라마에서 영향받은 자신의 성향을 이 영화에 온전히 드러냈다. “극장에 걸리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한 채 그냥 실험하는 기분으로 찍은 영화”라고 자평하는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은 스튜디오 시스템에서 만들어진 영화 장르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충격을 줬다. 뉴욕 거리에서 16mm 흑백 필름으로 촬영된 이 영화에서 배우들은 자신들의 대사를 만들어가면서 인물을 만들어 나갔다. 흑인 재즈 음악가 휴가 사회의 인종 차별을 실감하며 살아가는 동안 그의 남동생 벤과 여동생 렐리아는 백인으로 착각할 만큼 검지 않은 피부 덕분에 별다른 불편 없이 사는 상황에서 이야기를 풀어가는 <그림자들>은 인종 문제와 흑인의 정체성에 대한 도전적 문제 의식을 던진 영화였다. 주제만큼이나 <그림자들>은 낯선 형식 때문에 일부로부터 관심을 끌었다. 기록영화식 접근이나 즉흥 연출의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사소하고 생생한 활기가 이 영화에 있었다. 무정형의 형식으로 꾸민 난장판 같은 영화였으나 삶에 밀착해 있는 분위기가 있었다.

 

카사베츠의 작품 세계를 연구한 영화평론가 레이 카니의 말에 따르면 "카사베츠는 주변부의 인물들에 관심을 가졌던 것 이상으로 주변적인 감정에 흥미를 느꼈다. 카사베츠의 모든 작품은 삶 속에서 실종됐거나 잊혀진 충동들, 감정상의 혼란과 같은 미세한 움직임을 존중하려는 노력의 산물이다”라고 언급했다. 그것을 레이 카니는 ‘가공되지 않은 경험’이라 불렀다. 카사베츠는 영화적인 표현 방식으로 영화 속 극적인 경험을 정리해 관객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것을 거부했다. “사람들은 ‘가공된’ 삶을 원한다. 그것이 쉽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지루하다. 나는 ‘속기법 영화’는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 영화는 관객과 경쟁하면서 그들을 앞지르려고 노력한다. 나는 관객의 틀을 깨뜨리고 싶다. 나는 관객을 뒤흔들어놓고 싶고 가공된 안이한 진실로부터 그들을 벗어나게 만들고 싶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선 줄거리가 별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의 영화는 지독하게 사소한 정황에서 풀려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카사베츠의 영화에서 관객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며 겪었던 것과 똑같은 과정, 탐구하고 깨우치고 질문을 던지고 생각을 바꾸는 가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레이 카니에 따르면 카사베츠의 영화는 ‘등장인물의 작은 감정이 플롯 때문에 희생되지 않도록 신경 쓴다. 매끈하게 플롯을 진전시키기 위해 내러티브의 뒤엉켜 있는 부분을 가지 치는 것을 거부한다.” 카니는 이를테면 카사베츠의 <그림자들>에서 개념화되지 않은 에너지들이 표면으로 떠오르는 구체적인 방법 몇 가지를 예로 들고 있다. (주인공) '벤에게 다가가 파티에 합류하고 침울함에서 빠져나오라고 말하는 젊은 여성의 묘하게 건들거리는 동작. 그로부터 몇 분 뒤 벤과 휴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을 때 우연히 바로 옆에 서 있던 렐리아의 겁에 질린 몸짓.‘ 카사베츠가 흥미 있어 했던 것은 바로 그러한 가변적인 삶의 모습이었다.

 

 

경험하는 예술로서의 영화

 

카사베츠의 영화감독으로서의 삶은 쉽지 않았다. 1960년대 초반 할리우드의 대제작자 스탠리 크레이머와 함께 일하며 <투 레이트 블루스>와 <기다리는 아이>를 연출한 카사베츠는 비타협적인 기질 때문에 사사건건 크레이머와 충돌했다. 할리우드의 권력자였던 크레이머는 카사베츠가 다루기 힘든 고집불통의 까다로운 감독이라고 소문을 퍼뜨렸다. 그후 10년 동안 카사베츠는 할리우드에서 일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1964년 가을까지 말단 제작자로 일했던 카사베츠는 홈 무비라도 만들 생각으로 다시 연출에 뛰어들었다. 1만 달러로 기자재를 빌려 모으고 결국 20만 달러에 달하는 빚을 내 찍은 <얼굴들>은 1968년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5개 부문의 상을 수상하며 흥행에도 꽤 성공했다. 카사베츠는 자신과 친지들의 집을 촬영 장소로 이용했다. 배우를 비롯한 상당수의 스탭들이 낮에는 돈을 벌고 밤에는 영화를 찍었다. <얼굴>은 중산층 부부의 결혼이 파경에 이르는 내용을 소재로 미국 중산층의 삶을 신랄하게 조명했다. 이 영화에서 미국 중상류 계층의 삶은 야수들이 득실대는 정글과도 같은 약탈의 세계로 묘사된다. 이 영화의 곁에서 지켜보는 듯한 생생함은 등장인물의 내면을 이해하게 만드는 그런 접근법이 아니다. 영화 속 등장인물과 마찬가지로 관객은 영화를 보며 혼란을 느낀다. 정해진 도식에 따라 등장인물의 내면을 이해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결론을 내리는 그런 영화 표현의 인습에 카사베츠는 도전했다. 그것은 카사베츠 스스로 인정한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의 작법과 카사베츠의 영화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뜻했다. 굳이 말하자면 카사베츠의 영화는 존 프랑켄하이머와 델버트 만이 1950년대에 텔레비전 생방송 드라마를 찍었던 방식과 흡사하다.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특정한 상황을 배우들과 스탭들이 경험하는 순간의 감정적 밀도가 관객에게도 전염되는 것이다.

 

카사베츠는 늘 배우들과 거리를 두고 배우들의 자발성, 심지어 카메라의 자발성을 최대한 존중했다. 그런 이유로 어떤 정형화된 영화 형식의 인습에서 동떨어져 있는 느낌을 준다. 그가 존중했던 것은 영화가 ‘경험하는 예술’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잡다한 상품들을 얻은 대신 삶을 상실했다. 이 나라에서 사람들은 21세에 죽음을 맞는다. 그들은 21세, 어쩌면 그보다 어린 나이에 죽음을 맞는다. <얼굴들>은 우리 시대의 미국 중산층에 대한 집중 공격이며 우리 사회 전반에 대한 경악의 표현이며 보수적 기질과 편협한 사고를 지녔고 교외에서 안전하게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한 부부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내 영화 속 등장인물들을 평가하지 않는다. 배우들은 촬영하는 동안 자신 및 다른 인물들을 절대 분석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들이 했던 말을 기록하고 사람들이 했던 행동을 필름에 담았을 뿐이다. 가급적이면 개입하지 않았다. 그들의 내면을 담지 않으려고 애썼다.”

 

<얼굴들>을 만들기 전까지 할리우드 스튜디오 영화에 출연하면서 돈을 벌었던 카사베츠는 <얼굴들>의 성공 이후에 비교적 활발하게 후속 영화를 찍었다. <남편들>(1970), <미니와 모스코비츠>(1971), <영향 아래의 여자>(1974),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1976), <오프닝 나이트>(1977) 등 꾸준한 작업 속도로 영화를 찍었다. 카사베츠는 늘 같은 방식으로 영화를 찍었다. 돈을 모으고 배우들과 협력해서 스탭들과 동지적 관계를 갖고 영화를 찍는 것이다. 할리우드에서 카사베츠는 이상한 방식으로 이상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었다. 1970년대 중반 평론가 아모스 보겔과 나눈 인터뷰에서 카사베츠는 격하게 토로했다. “내 식은 너무 힘들다. 이렇게 힘든 일을 더이상 좋아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영화 작업을 즐기니까 울지는 않지만 육체적인 한계를 느낄 때면 슬퍼진다. 영화 작업이 다 끝나면 모든 사람에게 굿바이해야 한다. 그들은 밤이나 낮이나 자신들을 희생하면서 일했는데 마지막엔 그저 악수를 나누고 뿔뿔이 흩어지고 그리고 나서 영화에 대한 모든 찬사는 내게만 돌아온다. 난 이럴 때 그들을 배신한 것 같은 쓰디쓴 아픔을 느낀다. 메이저 배급사가 개입하게 되면 영화를 가능하게 한 모든 사람의 노고는 까맣게 잊혀지고 무시된다. 그들은 그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표 한 장 얻지 못한다. 그게 내가 메이저 배급사를 싫어하는 이유다.”

 

 

정의되지 않는 진짜 인간

 

카사베츠 영화의 보증 수표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였다. <형사 콜롬보>로 훗날 유명해진 피터 포크는 <남편들>에 출연한 후 카사베츠와 우정을 나누며 <영향 아래의 여자> 출연을 자청했고 제작자로도 나섰다. 벤 게자라 등의 다른 남자 배우들을 비롯해 그의 아내이자 평생 영화적 동지였던 지나 롤랜즈는 특히 카사베츠의 영화를 통해 위대한 미국 여배우의 족보를 남겼다. ‘누구나 연기를 할 수 있다고 믿는 쪽’이었던 카사베츠는 카메라로 배우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는 가운데 그들에게서 최대한의 집중력을 끌어내기 위해 찍고 또 찍는 방법을 썼다. “난 배우들이 하던 일을 멈추고 내게 묻기 전까지는 그들이 하는 모든 것을 믿는다. 난 연기자들과 긴 토론을 하길 원치 않으며 연기자들이 무엇을 생각하는지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그 사람들에게 무언의 압력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영향 아래의 여자>는 지나 롤랜즈를 비롯한 배우들의 연기로 유명한 작품이었다. 지나 롤랜즈가 연기하는 여주인공 메이블은 사방 모든 것으로부터 수시로 영향을 받는 민감한 주부이다. 남편 닉이 야간 작업으로 집에 들어오지 못하자 그날 밤 모처럼 부부만의 오롯한 데이트를 즐기려 했던 메이블은 낙담한다. 그녀는 신경증과 불안에 시달리며 술집을 전전하다가 한 놈팽이를 만나 집안으로 끌어들인다. 영화 초반에 비친 메이블은 어느 모로 보나 정상이 아니다. 그런 메이블을 배려하는 남편 닉의 노력은 눈물겹다. 메이블의 감정은 중간이라는 게 없다. 기쁨도, 슬픔도, 분노도 극단으로 치닫는다. 메이블 주변의 친구들은 그런 메이블의 정신이 나갔다고 여기지만 메이블을 유일하게 받아들이는 이는 아이들뿐이다.

 

그때부터 메이블의 감정에 동참하는 이상한 경험이 생겨난다. 안절부절못하는 메이블의 모습을 보며 관객도 신경 쇠약 직전이 된다. 지나 롤랜즈의 연기가 너무 역동적인 나머지 그녀의 탄식과 웃음과 수다와 눈물을 지켜보노라면 진이 다 빠질 지경이다. 메이블은 다만 감정이 풍부한 여자일 뿐이라는 걸 서서히 알게 된다. 별다른 감정 변화 없이 일상의 절차를 치르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메이블은 한시라도 감정이 충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여성이다. 메이블의 캐릭터는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관한 사회의 선입견을 비웃는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아이들을 초조하게 기다리는 메이블이 거리에서 시간을 물을 때 아무도 그녀에게 대답하지 않는다. 쉴 새 없이 중얼거리며 미간을 찌푸린 채 환상적인 각선미를 자랑하는 미니스커트를 입은 중년의 주부를 대하는 거리의 행인들은 모두 그녀를 슬슬 피한다. 메이블은 그런 거리의 행인들에게 화가 난다. 관객들도 화가 나기 시작한다. 마침내 시어머니의 강권으로 메이블이 정신 병원에 입원하는 대목에서 관객들의 화도 함께 치밀어 오르기 시작한다. 주로 들고 찍기를 통해 등장인물들의 예측 불허의 행동을 관찰하는 카메라는 메이블과 그의 남편 닉의 겉모습을 통해 인간 심리와 행동의 고정된 틀을 마구 부수기 시작한다. 여기 한마디로 정의되지 않는 진짜 인간이 있다고 시위하는 것처럼, 존 카사베츠의 카메라는 정해진 플롯에 따라 예상할 수 있는 결말을 향해 가는 대다수 영화의 관성을 저 멀리 앞선다.

 

 

기법을 떠난 영화를 찍는다

 

<영향 아래의 여자> 이후 카사베츠는 전작과 닮지 않은 후속작이라는 그 자신의 변화무쌍한 영화 세계를 계속 펼쳐 보였다.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과 <오프닝 나이트>는 <영향 아래의 여자>를 잇는 불후의 3부작이었으나 관객들의 반응은 차가웠다. “항상 다음 작품을 만들기 위해 방금 만든 작품이 굉장히 성공하기를 바란다. 그게 뭐 그리 큰 비극은 아니다. 진짜 비극은 가난하지만 젊고 독창적인 영화인들이 어디 가서 입도 열어보지 못하고 따돌림을 당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영화와 사랑에 빠져 있다. 돈이란 우리에게 중요하지 않다. 우리는 36시간 내지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일하면서도 의기양양함을 느낄 수 있다.” <차이니스 부키의 죽음>의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 카사베츠는 정해진 결말을 내려야 하는 그 장면을 찍을 수 없다고 버텨 제작자를 분노케 만들었다. 카사베츠는 늘 고정된 카테고리에 자신의 영화가 묶이는 것을 거부했다. 레이 카니는 카사베츠의 영화가 홀대받았던 이유를 바로 그런 카사베츠의 태도에서 찾는다. 그는 영화 속 상황과 등장인물의 감정을 통제하기보다는 관찰하고 경험하는 태도를 취했다. 그건 위대한 실험이 행해졌던 1960년대와 70년대 세계 영화의 지형도 안에서도 유별나게 두드러졌던 카사베츠만의 색깔이었다. 이후 <글로리아> <사랑의 행로> 등의 영화로 베니스와 베를린영화제에서 대상을 수상했던 카사베츠는 끝까지 자신의 영화 세계를 지킨 드문 경력을 남겼다.

 

카사베츠는 누구로부터 영향받지 않았고 누구에게도 영향을 주지 않은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카사베츠의 그림자는 현대 영화 곳곳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평론가 리처드 콤브스는 카사베츠의 비인습적인 영화 스타일과 접근 태도를 세계 곳곳의 젊은 감독들의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다고 카사베츠 죽음 직후 쓴 평문에 밝혔다. 카사베츠는 기법에 매몰되지 않음으로써 형식을 창조한 예술가였다. 그리고 삶을 창조했다. 카사베츠가 주목한 것은 영화가 아니라 영화에 담긴 삶이었다. “오늘날 영화를 만들고 보는 대다수 사람은 기법에만 관심을 쏟는다. 난 영화 기법에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좋은 영화는 기법을 떠나 진실한 느낌을 담아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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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6 14:35 2006/10/26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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