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트 리크야에서 두 소년이 살해당하다

2005년 5월 4일 이른 아침에 15세의 자말 자베르는 베이트 리크야에서 순교하였다.


고립장벽 반대 캠페인The Anti-Apartheid Wall Campaign은 오늘 베이트 리크야에서 고립 장벽에 대항하다 점령군에 살해당한 두 순교자 소년의 죽음을 애도한다. 마을에선 장벽이 무너질 때까지 그들의 저항활동이 계속될 것이라 맹세하였다.

 

15세의 자말 자베르Jamal Jaber와 14세의 우다이 모피드Uday Mofeed는 단지 10m때문에 차가운 피로 죽었다.

 

두 순교자는 앰뷸런스로 후송되었으나 라말라의 주요 입구인 콸란디야Qalandiya의 점령 검문소에서 너무나 오랜 시간 검문당해 라말라의 병원으로 가는 길이 지연되었다. 앰뷸런스가 병원에 가도록 허가받은 때에, 두 소년은 출혈로 죽고 말았다.

 

오늘(5월4일) 초저녁에 청소년 무리들이 고립장벽 건설을 위해 마을의 땅을 파괴하는 점령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하였다. 점령에 대한 시위와 대치는 최근 베이트 리크야에서는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한 무리의 시위자들이 점령군의 사격에 1 킬로미터를 쫓겼다. 마을 주민들은 거리를 메우고 그들을 보호하려 하였으나 점령군은 계속 추격하며 사격을 멈추지 않았다. 자말은 총알이 가슴을 통과하였고 우다이는 허벅지 윗부분을 맞아 동맥이 절단되었다.

 

두 소년의 죽음은 라말라 서부지역에서 고립장벽에 반대하는 시위에서 총 6명이 살해당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많은 비뚜Biddu와 베이트 이쟈Beit Ijza의 고립장벽에 저항하는 대중적 활동가들이 점령군에 저격당했다.

 

고립장벽이 마을로 확장됨에 따라 최근 몇 주간 이 지역에서의 점령군의 폭압은 증가하고 있다. 단 두 주 동안 36명 남짓한 마을주민들은 고무탄과 최루탄, 총탄에 부상당했다. 그러나 폭압은 마을의 저항자들을 억누르지 못 했다. 베이트 리크야에 발맞춰 어디(마을 이름 안 보임)와 사파Saffa의 주민들은 수백명이 매일 시위와 행진으로 고립장벽에 강하게 저항하고 있다.

 

자말과 우다이와 같은 어린 소년들은 고립장벽과 주민들의 땅과 미래를 훔치는 게토화에 대한 반대 운동의 최전방에서 활동한다. 아부 이야드Abu Iyad라는 한 순교자의 친척은 이것은 이스라엘의 점령이며 우리가 그들로부터 원하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우리 땅을 훔칠 수 있고, 우리의 아이들을 죽일 수 있지만, 우리는 떠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머무를 것이다. 이곳은 우리 땅이다. 그들은 우리가 떠나길 원하지만 미래는 우리의 것이며 떠나는 자는 점령군이 될 것이다.”

 

베이트 리크야는 800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곳으로 고립장벽의 건설을 위한 불도저에 의해 이미 상당 부분을 파괴당했다. 최근까지 올리브 과수원이었던 곳이 지금은 모조리 파괴되어 텅 비었다. 가장 비옥한 2,350 더넘dunum(단위)의 농장 역시 그렇게 될 것이다.

 

장벽은 베이트 리크야를 따라 9 킬로미터 가량 뻗어 있으며 서쪽에서 처음 돌출하고, 북쪽에서, 마지막으로 동쪽에 돌출되었고 그렇게 삼 면으로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또 장벽이 뻗을 곳은 이슬람의 두 역사적 성지인 Khirbat Ganayem과 Khirbat Bakr의 주요부분을 파괴할 것이다.

 

베이트 리크야에 대한 최근의 게토화는 이스라엘의 재산 몰수, 식민지화, 추방 정책의 완성이다. 1948년 마을은 2000 더넘의 땅을 몰수당했고 1967년에는 1000 더넘을 상회하는 땅을 메보 호론Mevo Horon 점령촌 근처의 점령촌 건설을 위해 이스라엘에 합병당하였다.

 


저항은 베이트 리크야의 일상이다

 


마을의 소년들은 고립장벽 저항 운동의 중심이다

 


총알은 자말의 몸을 통과하였다

 


14세의 우다이 다리의 상처 X-레이. 앰뷸런스가 검문소에서 장시간 검문당하지 않았다면 우다이는 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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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ve ammunition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네요. 알고 계신 분은 가르쳐 주세요.
raputer@jinb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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