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네 할머니

작년에 마지막으로 뵀을 때 아 ㅁ이네 외할머니도 곧 돌아가시겠구나.. 그런 느낌이 있었다. 반가워해주시며 손을 꽉 쥐어주실 때 그 악력은 여전했지만, 걷지를 못 하셔서, 불효막심한 생각이지만 그래도 올해 돌아가실 것 같으니 돌아가시기 전에 한 번 찾아봬야지. 그 생각을 비췄더니 어머니가 우리 내려오는 때에 맞춰 할머님을 집에 모시고 오셔서(원래 모시고 오실 예정이었는데 더 일찍 모셔오심) 며칠 같이 지내봤다. 이번에 봬니 다행히 몸상태가 더 좋아지신 것 같아서 올해 돌아가실 걱정은 없어졌다.

 

얘네 할머니는 91세시다. 내가 만나본 인간 중에 가장 나이가 많으시다. 어릴 때부터 우리 외할머니랑 동네에, 같은 집에 살아왔고 다 커서는 우리 친할머니랑 같은 집에서 몇 년 살았다. 내가 가진 할머니라는 존재들, 노인 일반에 대한 경험과 이미지가 있는데, 보통은 몸이 안 좋고, 안 좋은 몸만큼 기억력도 사고력도 감퇴한다. 약간 어린애 대하듯 대해야 하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어린애가 아니기 때문에 짜증날 때가 있다.

 

얘네 할머니는 전혀 우리 할머니들 같지 않으시다. 처음 뵀을 때도 너무 깜짝 놀랐다. 정신이 정정하시다,를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몸은 정말 안 좋으신데, 사고력도 기억력도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 본인의 젊은 시절에 비하면 좀 떨어지실 수도 있다. 다만 노인같지 않은 점들... 했던 말 무한반복하거나, 사건이 언제 일어났던 것인지 기억하지 못한다거나.. 그냥 그런 것들이 전혀 없으시다. 그냥 평범한 대화가 된다! 내가, 우리 외할머니를 엄청 사랑하면서도 그 노인의 전형성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그런 전형성을 가진 우리 할머니들을 무시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 나이대에 으례 갖게 될 물리적 특징들을 존중한 게 아니고, 그냥 무시했던 거란 걸 알게됐다. 사랑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건 전혀 양립불가능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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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발<

 

내가 미친듯이 즐겨신는 크록스 신발이 있다. 그거 신고 다니면 발이 저렇게 탄다 ㅎ 겨울에도 따뜻한 나라 갈 때 저거 신고다녀서 발이 여전히 타있다. 어머니가 발을 보시고는 막 이게 뭐냐고 그 신발 그만 신으라고;; ㅋㅋㅋ 하셨다. 마침 할머니께서도 자기도 물어볼 참이었다고, 이상하다 여름도 아닌데 저렇게 탔을 리는 없고, 때가 낀 거면 위아래만 하얄 수도 없고, 뭘까.. 싶었다고 두 분이서 막 웃으심. 눈도 좋으시구나! 귀는 잘 안 들리시는데, 누구에게든 폐 끼치는 걸 정말 싫어하셔서.. 내가 텔레비전 소리를 크게 하고 보시죠, 그랬는데 그럼 동네 사람들한테 다 들려서 안 된다고, 본인은 혼자 있을 때 보통 소리 꺼놓고 화면만 본다고, 근데 재미도 없다신다.

 

그런데 귀가 잘 안 들리시니까 나는 무슨 대화를 어떻게 해야 할지는 좀 잘 모르겠더라고.. 어제 한 시간 정도 둘이 있는데 나는 좀 어색했는데. 시어머니 앞에서야 바닥에 막 드러눕지만, 할머니 앞에서 드러눕기도 그렇고...(결국 드러누웠다-_-;;) 자세도 불편하고.. 뭐 간단한 말을 해도 잘 못 들으시니까. 그러다가 할머니가 그냥 이런저런 말씀을 하셨는데 그냥 평범한 대화였다, 텔레비전 소리 얘기밖에 기억도 안 남; 같이 티비를 보며 자연스러운 대화를 나눴다. 일상적인 소리는 거의 못 들으시는데도, 목소리가 전혀 커지지 않았다. 힘이 없어서라기보다, 그냥 이 정도 볼륨이 맞다고 생각하시는 게 아닐까 싶었다.

 

원래 반구대에 갈 계획이었고 딱히 할 일도 없어서 모두 원하지 않지만 갔다 ㅋㅋㅋ 하지만 할머님은 몸이 정말 편찮으시기 때문에, 생각보다 집에서 반구대까지 너무 멀어서ㅜㅜ 차 탄 시간이 길어지는 바람에 원하는 만큼 구경하지 못하고 서둘러나왔다. 할머니는 휠체어 타고 다니셔야 하는데, 길이 휠체어 다닐만한 길들도 아니고...ㅜㅜ 그리고 처음 천전리에 딱 도착했는데 할머니 식사를 하셔야 하는 거라.. 쪼금씩 드시기 때문에 주기적으로 꼭 뭘 드셔야 하는데 나는 그런 건 상상조차 못 했고ㅜㅜ 어머니도 아 내가 왜 간식 안 챙겨나왔을까.. 그러심 그래서 천전리 공룡발자국은 못 보고 주변에 식당을 급하게 찾아가서 밥을 먹고 반구대 가서 좀 보고 돌아옴. 할머님은 "공룡 발자국 실컷 보고 왔나?" ㅋㅋ 그러심. 구경하는 데 방해될까봐 너무 저어하셔서 나도 구경하기가 저어됐다. 할머님은 반구대로 이동하며 "여물게 보고 오라"셨다. 대충 구경하고 돌아오는 동안 너무 피곤해서 차 안에서 주무셨단다 ;ㅅ; 돌아온 나를 보고 "한도 원도 없이 보고 왔나?"하고 물으셨다. 우와.. 뭔가 이렇게 쓰니까 별 거 아닌 것 같지만 ㅜㅜㅜ 그냥 이런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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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 원도 없이 구경하러 가는 모습. 어먼 ㅣ유럽 여행 가신대서 이것저것 선물을 챙겨놨는데(언니가 전부 챙겨줬는데 내가 챙긴 척 함-ㅅ-) 셀카봉을 가장 좋아하심 ㅋ 이 사진 보여드리며 이런 구도가 가능하다고 알랴드리니 좋아하심

 

할머니는 차 안에서, 그리고 집에서도 가끔 손가락으로 톡 톡 손잡이를 두드리며 리듬을 타고 계신다. 어떤 리듬인 걸까? 할머니랑 나는 깊은 관계가 되지 못하겠지만, 그 만큼 시간을 공유하지 못할테니까, 안타깝지만. 할머니가 가고 싶은 곳은 단 한 곳 저승이란다. 이 얘기도 나한테 직접 하신 건 아니고 어머니가 해 주심.. 마치 우리 아빠처럼-ㅁ- 우리 어머니는 그런 사람이 아닌데, 할머니께 "엄마, 엄마가 가고 싶은 데가 어디야아?"하고 물으시니 할머니께서 나는 가고 싶은 데가 한 군데밖에 없다, 하시니 "어디? 저승?" 그러시는 거임-ㅁ- 우리 아빠가 할머니한테 자주 치던 드립인데ㅜㅜㅜ 그때마다 아빠한테 하지 좀 말라고 그랬었는데 우리 어머니가 어찌 이런..-ㅁ- 하고 깜놀해서 어머니 무슨 그런 말씀을 하세요! 그랬더니 으응 할머니가 항상 하시는 말씀이라고. 가고 싶은 데는 한 군데밖에 없다고, 저승이라고 그런다고. 노인들이 아프다, 아프니까 빨리 죽어야지, 이렇게 말하는 거야 수도 없이 들어봤지만 어떤 반응을 기대하고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게 아니라서. 일단 나한텐 그런 말씀도 안 하셨고. 사리분별 정확하고, 진짜 자기 딸에게조차 조금의 폐도 끼치지 않으시려는 모습이 너무... 신기하고 왠지 부럽고 우리 할머니들이랑 비교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맴매하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온전한 정신으로 육체의 감옥에 갇힌 그 기분이 어떠실지.. 괜히 잘 알지도 못하면서 노인의 삶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 외할머니 보고 싶네ㅜㅜ 돌아가면 만나러 가야지 진인옥 여사. 기승전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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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 암각화 잠깐 다녀옴

  • 등록일
    2015/04/04 20:53
  • 수정일
    2015/04/04 20:53
  • 분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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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호 박사가 2000년 반구대 암각화를 실측한 뒤 색채를 그려넣은 도면

근대 이전의 인류의 역사와 문명에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는데 작년에 팔레스타인에 가기 위해 자료 조사 좀 하다가 갑자기 인류 문명이 좋아졌다 -ㅁ-;; 너무 재밌어 수메르 등 왼갖 신화도 다 읽고 왼갖 유적지 다 밟아보고 싶다. 팔레스타인은 비옥한 초승달 지대의 일부로, 9천 년 전에 사람이 정주했던 흔적(우물)이 있고 7천 년 전에 큰 도시를 이루고 산 동네(제리코)도 있고, 완전 인류 문명의 보고이다. 유적들이 무궁무진하다. 이런 유적들은 비단 팔레스타인의 것만이 아닌데, 주로 이스라엘의 점령 때문에 유적들이 방치/훼손되는 것이 너무 화가 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이건 팔레스타인 것도 이스라엘 것도 아닌데, 인류의 문화인데! (이스라엘이 고고학을 점령과 식민화의 내러티브로 이용하고 있는 것은 꽤 오래 전부터 지적돼 왔으며, 본인도 팔레스타인 여행 가이드북을 시작하며 언급할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한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ㅁ-;; 갑자기 울주군의 반구대 암각화에 꽂혀서 미친듯이 알아보니 5500년도 더 된 암각화가 수몰돼 사라져가고 있다고... -ㅁ- 헐

 

장 박사는 반구대 암각화에 그려진 중간 단계 그림들이 최소 55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새겨졌다고 했다. 몇몇 그림들은 이보다 더 오래 전에 그려졌다는 설명이다. "대곡리 암각화에는 65마리의 고래가 새겨져 있다. 고래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11종 이상의 고래를 쉽게 찾을 수 있다. 두 척의 배가 한 마리의 고래를 잡는 모습은 전세계에서 유례가 없다."

키네틱 댐 설치하면 암각화 앞에 드러눕겠다

 

ㅁ이 어머니께 전화 드려 설날에 포항 시댁에 방문해 울주군에 가자고 제안 드렸다.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지만 알았다고 하심 ㅋ 그런데 설날에 피치 못하게 시댁에 못 가게 돼서 여차저차 이번에 와서 오늘 다녀왔다. 다녀올 만한 적절한 상황은 아니었는데 그건 나중에 쓰고.

 

검색해서 읽어본 글은 다양한데 몇 개만 링크해 놓음:

  1. 반구대 매거진 - 왜 뒷편 안 나오지? 재밌다!
  2. 국보를 물속에 상시로 담가놓은 나라가 어딨느냐!
  3. 그림으로 쓴 역사책 - 국보 반구대 암각화, 물속에 잠깁니다
  4. 선사시대 한국문화의 기원--울산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특히 반구대 찾아가는 데에는 4번 글이 도움이 됐다. 여행지로서 개발된 곳들이 아니라선지 가면 뭐가 어떻게 되는 건지 알 수가 없었..

 

 

뭐 지도 봐도 홈페이지 봐도 가서 뭐 어떻게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는데 가면 어떻게든 되겠지.. 했는데 뭐 역시 어떻게든 됐다. 그 일대는 잘 걸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천전리 각석부터 공룡발자국, 반구대 암각화와 관련 박물관들 다 걸어다닐 수 있다.

 

천전리 각석 있는 데에는 밥먹을 데가 없는데, 물론 천전리 나와서 옆에 있는 마을 안으로 들어가면 있다. 식당이 있고 없고는 참 중요한 정보라.. 하지만 반구대 암각화에는 암각화 입구에 바로 식당도 있고 민박도 있었다.

 

반구대 암각화는 옛날에는 그 앞까지 갔던 모양인데 지금은 엄격하지는 않게 출입이 금지돼 있다. 그래서 망원경으로 멀리서 봐야 한다. 물 빠진 때기 때문에 가까이 가서 봐도 될 것 같은데 왜 못 가게 해놨는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정말 가며 안 되게 해 놓은 건 아니고 갈라면 갈 수 있다니까?; cctv도 있다지만 누가 그걸 실시간 모니터하는 것도 아니고. 그러나 가족끼리 가서 괜한 무리수를 두고 싶지 않아서 가까이 안 가봄. 그냥 그 경치만으로도, 사실 그 일대가 막 여행다니고 그런 분위기는 아닌데, 너무 아름다워서, 나무도 돌도 강도 다 아름다워서 거기 가만 앉아서 책도 읽고 시도 읊고 ㅎㅎㅎ 정말 그러고 싶었다. 나중에 여유롭게 와서 거기 민박에서 잠도 자고.. 하루이틀 일대를 다 걸어보고 싶다.

 

하지만 차 없이 가기는 당연하지만 불편하다. 버스 정류장이 있긴 한데 내려서 한참 걸어야 한다. 그 안을 걸어다니며 구경할 거 생각하면 사전에 힘 빼지 않는 쪽이 나을 것이 자명하지 아니한가. 자전거 가지고 가면 좋을 것 같은데 35번 국도가 좀 위험한 편이라. 근처 가지산에 '석림사'라고 유명한 비구니 절도 있던데 자전거 타고 다 돌아보면 좋겠다.

 

반구대 쪽은 물에서 수영하고 그런 것도 (당연히 문화재 보호를 위해) 금지돼 있는데, 아직 덥지 않아서 그런지 물에 들어가고 싶다기보다 반구대든 천전리든 물가에 앉아서 하염없이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그냥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뭐 언젠가 기회가 있겠지. 우리 ㅁ이는 이런 풍류를 즐길 줄 모르는 닌겐이라ㅜㅜ 언제 나 혼자 와서 로맨스를... 로맨스 그레이<

 

여기 일억만년 전에 공룡이 걸어다녔었고 신석기 시대에 사람들이 고래를 잡고 그림을 그렸었고 화랑들이 놀러왔었고 정몽주가 유배됐었고 그런 오래된 역사가 너무 좋고< 오래 앉아서 음미하고 싶다 그 역사들을 상상해 보고 싶다. 난 항상 어디든 급하게 여행다니면서 고적하고, 사람 많지 않은 곳을 볼 때마다 다음에 시간 길게 들여서 와서 지내야지 그러고 다시는 안 감 ㅜㅜ 근데 이번엔 너무 잘 못 봐서 다음엔 진짜로.. 여긴 꼭 와야지. 그리고 포항에서 가까운 줄 알고 갔는데 생각보다 오래 걸려서 모두 힘들었음 아오.. 암각화랑 반구대에 대한 책을 읽으려다 잊고 있었는데 조만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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