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성

  • 등록일
    2006/08/03 23:15
  • 수정일
    2006/08/03 23:15
  • 분류
    마우스일기

요즘 폭력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본좌 스스로의 폭력성에 대한 성찰해 보지 않았던 건 왜일까?

 

그건 본좌의 폭력성이 본좌에게 대단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정도 폭력적이고 어느 정도 폭력성을 드러내고 어느 정도 다른 식으로 해소하고 어느 정도 생각해 보고 대부분은 관심 없다.

 

(폭력적이라는 건 넓은 의미에서다, 모든 의미에서<)

 

다른 사람과 마찰을 일으킬 정도로 폭력적이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폭력성도 역시 재미있게 승화(?)시켜서 마찰이 없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웃기게 심한 욕을 사용한다든지, 한 대 때린다든지, 같은 폭력적인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 못하는 말(역시 욕이나 저주)을 해서 속을 시원하게 해 준다든지.

 

아무래도 많은 경우에는 폭력의 대상에게 나의 폭력이 닿지 않아서(예를 들어 멀리 있는 정치가들이나 전쟁광들) 아무 문제 없을 수도 있다.

 

 

근데 아무래도 상관없다. 아무튼 넌 너무 폭력적이야,라는 말을 들은 적은 많아도 네가 폭력적이라서 너무 싫다라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어서 별로 관심이 없는 게 아닐까. 역시 생각이 미천해서 모르겠음.

 

원초적 폭력성이라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 없을지도 모른다. 양편이 다 입증할 방법은 쌔고 쌨겠지. 인간도 워낙에 동물이었고, 자연상태에서 살아남아야 했고 그래서 생존적 폭력이든 뭐든 간에 다른 동물들이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이것이 야수성. 문자계몽받으면서 야수화의 경향을 잠재웠다. 이것이 문명.

 

평화운동의 줄기도 매우 다양하다만 어떤 흐름에서는 인간의 원초적 폭력성을 부정한다. 이에 동조하는 모든 사람은 원초적으로 비폭력적일까?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떤 이는 (여기서부터 완전 다 내 추측) 원초적 폭력성이 너무 커서 자신의 폭력성에 대한 부정으로 비폭력 평화라인에 서게 되지 않았을까? 마치 피를 너무 좋아하는 의사가 정신과의사가 된다같은 흔한 스토리처럼. 비폭력 평화라인에 서서 폭력성을 억제하는 바람에 사적 공간에서 폭발하게 된 건 아닐까?

 

잠깐 짚고 넘어가자면 그렇다고 해서 사적으로 폭력성을 폭발시키는 게 정당화되진 않는다. 그냥 분석해 보는 거다.

 

세상에 새디스트라는 게 있을까? 올바름과 정상을 추구하는 주류적 흐름이 없는데도 그런 게 있을 수 있을까?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거나 예의바르게 혹은 정상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심한 압박감이다. 새디스트나 매저키스트같은 것은 그냥 주류 흐름의 부작용 아닐까?

 

 

그건 그렇고 옛날부터 폭력성이 발현되기 위한 조건이 궁금하다. 어떤어떤 조건들이 맞아 떨어져야 하는 걸까? 예를 들어서 전쟁과 같은 극한 상황에서 총을 드는 자와 들지 않는 자는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 아니면 똑같이 마구 총을 쏘아대고 살아남았는데 왜 어떤 사람은 미치고 어떤 사람은 미치지 않는 걸까?

 

아니면 카니발 비슷하게, 국가 폭력과 개인의 폭력성이 어울러지는 씬들, 예를 들어 용역으로 투입되어 좋다고 때려부수는 사람들.

 

 

폭력성이라... 한 번이라도 폭력의 피해자가 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반사적으로 폭력을 거부한다. 나도 피해자 비슷한 적이 있었는데 왜 나한텐 그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나 어릴 때 개한테 한 번 물렸다고 그 트라우마가 아직도 있는데. 왜 폭력적 상황에 대해서는 없을까?

 

나는 어떤 식으로 폭력을 해소하고 있나? 오늘은 진삼국무쌍이란 게임을 해서 40분동안 800명을 죽였다. 완전 학살자.. 게임이나 스포츠로 폭력을 해소하는 건 어디까지 가능할까? 그런 게임이나 스포츠가 오히려 폭력성을 심화시킨다면 그건 얼마만큼일까? 어떤 조건들이 맞는 걸까?

 

전부다 의문문이네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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