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철 선생으 말쌈

  • 등록일
    2005/01/17 14:01
  • 수정일
    2005/01/17 14:01
  • 분류
    마우스일기

26차 수요대화모임(04.12.22) 정리 - 김종철 선생(녹색평론 발행인)  

 

 

 경제가 위기상황이라는 얘기가 많다. 장기불황의 시작이라는 해석도 있고, 미국의 패권적 질서유지가 바로 시장을 개척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즉, 북한도 미국의 입장에서는 개방되지 않으면 안 되는 하나의 시장이라는 것이다.
 쿠바와 북한은 현존하는 유일한 사회주의 국가이다. 그런데 이 두 나라는 동구권과 소련이 몰락하면서 석유 등 원조가 끊기면서 위기를 겪게 된다. 그런데 농업의 기계화와 화학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던 북한은 괴멸적인 타격을 입은 반면, 농업의 위기를 예견한 카스트로의 지휘 아래 유기농업을 준비하고 있던 쿠바는 자립적 농업혁명에 성공한다. 물론 쿠바도 상당한 어려움을 겪지만 지금은 국가 전체가 유기농업을 광범하게 실천하게 되었고, 도시 곳곳의 빈터가 주민들의 자발적인 참가에 의한 텃밭이 되어 자급이 가능한 국가가 되었다. 또한 쿠바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는 도시 교통수단, 즉 자전거를 주요 교통수단으로 삼았다. 21세기에 인류가 생존하려면 자동차의 시대에서 ‘자전거의 시대’로 넘어가야 할 것이다.

‘소비’는 경제 위기를 풀 수 없어

 현재 경제적 위기상황을 푸는 방법으로 ‘소비’를 많이 얘기한다. 그런데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논리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한다. 갈수록 더 많은 소비에 의해서 유지되는 경제체제라면 더 이상 유지되어서는 안 되며, 빨리 망해야 한다. 사실 그런 식의 경제는 미국의 패권주의와 초국적 기업과 그들과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극소수 특권층들의 단기적인 이익에 봉사할 뿐이며, 자연을 무한하다고 생각하고, 무한개발이 가능하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완전히 비현실적인 환상에 빠져있는 경제체제이다.

 그러나, 지금 정부나 주류 언론이나 수많은 대중들은 아직도 이런 식의 경제만이 살길이라는 어리석은 믿음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경기부양이라는 명분으로 정부는 어이없게 수백개의 골프장을 건설하려 하고 있다. 골프장은 농민 공동체와 숲을 파괴하고, 지하수를 오염시키며, 그 하류에는 어떠한 농사도 지을 수 없게 하며, 지금 그나마 한국농업의 마지막 구명수단이라고 할 수 있는 친환경농업을 불가능하게 한다. 이런 골프장을 짓는 데 한 건당 국고에서 500억씩 보조하겠다는 기가 막힌 정책을 정부가 내놓고 있는 현실이다. 지금 현재 골프장은 전국에 200개도 넘는데, 앞으로 250개를 더 신설할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골프장이 이 좁은 나라의 전 국토 중 1/20을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사실 경제성장의 논리에 붙들려 있는 정책입안자들의 생각으로는 이러한 골프장 건설 따위 이외의 방책을 구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결국 문제는 경제시스템의 근원적인 수정, 다시 말해서 보다 많은 생산, 보다 많은 소비의 사이클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의 방식 그 자체를 근본적으로 방향전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보다도 환경을 지키려는 싸움이 치열하다. 재작년의 3보1배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지율스님의 천성산을 살리려는 단식투쟁, 핵폐기장 반대를 위한 부안주민들의 투쟁 등, 지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높은 수위의 투쟁들이다.
 그런데 이런 극한적인 투쟁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여전히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이는 단지 정부의 문제가 아니라, 이런 점에서 근본적으로 정부와 같은 입장에 서 있는 이 나라 주류사회를 지배하는 기본적인 세계관과 가치관의 문제다. 그들은 경제와 환경을 대립적으로 생각하는데, 지금과 같은 경제논리로서는 그들의 생각이 맞다. 지금과 같은 반생명적인 자본주의 경제라면, 소수를 위해 다수를 희생시키는 것을 구조화하고 있는 자본주의적 방식이라면, 당연히 환경과 경제는 대립적일 수밖에 없다.

 

 <유한계급론>의 저자 돌스타인 베블렌(Thorstein Veblen)은 19세기 말 미국의 졸부들의 생활행태를 묘사하면서, 과시적 소비(conspicuous consumption)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들이 소비하는 많은 것들이 생활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는 과시를 위한 소비라는 것이다. 미국의 캘리포니아 대학의 어떤 역사학자가 학생들에게 슈퍼마켓에 가서 ‘인간 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있는지 각자 조사해오라는 숙제를 낸 적이 있다. 그런데 학생들의 조사결과는 슈퍼마켓들에 쌓여있는 엄청난 상품들 중에 실제로 우리 생활에 꼭 필요한 것은 거의 없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인간이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물건은 그리 많지 않다. 남의 눈이 없으면 가질 필요가 없는 것을 가지기 위해 대부분 소비하고 있는 것이다. 자본주의 제도 속에서 소비는 본질적으로 ‘과시적 소비’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진정한 필요에 의한 소비에는 상한선이 있겠지만, 과시적 소비는 끝이 없으므로 생태적 파국은 불가피하다.

현재의 시스템을 ‘보이코트’하자

 간디는 “인간의 진정한 욕구(need)를 위해서는 지구자원은 무한히 풍요롭지만, 인간의 탐욕(greed)을 위해서는 지구자원은 희소하다”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인위적인 욕망의 계속적인 창출에 의존하는 경제시스템은 필연적으로 지구 자원을 고갈시킬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지양하느냐가 근본문제이다.

 사회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자본주의가 가진 모순들을 대개 두가지 방식으로 풀려고 했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파리꼬뮨에 있어서처럼 민중봉기 혹은 '총파업'으로, 독일의 베른슈타인이나 카우츠키 등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의회를 장악함으로써 자본주의 체제의 극복을 겨냥해왔다. 그러나 마르크스주의자나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방법에는 한계가 있다. 역사적 실패를 운운하지 않더라도, 오늘날 이런 방법은 비현실적이고, 개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큰 의미가 없다. 사람은 먼 미래의 유토피아를 위해 살 수는 없고, 당장 나름대로 ‘행복’해질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의 행복은 어떤 행동의 결과물로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행동(덕있는 행동(virtuous act))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반면에 간디는 ‘비폭력’적 보이코트라는 방식을 보여주었다. 간디의 사상과 행동은 오늘날 깊이 음미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간디는 영국 식민당국이 소금을 전매품으로 만들자 수많은 인도 민중과 수백킬로를 걸어 바다까지 가서 온갖 탄압을 무릅쓰고 직접 소금을 만들어 자치적 삶의 방식을 천명함으로써 정면으로 식민주의자들에게 타격을 가했다. 또한 영국에서 제조된 옷이 대량으로 침투하는 것에 대항해서 직접 물레를 돌려 자립의 중요성과 노동의 가치를 직접 가르쳤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은 ‘불복종운동’이다. 단순한 불매운동만이 아니라, 직장에서 여성이 차 심부름을 거부하는 것, 쓸데없이 옷을 사지 않는 것, 대기업이나 반생태적인 직장에 취직을 하지 않는 것, 텃밭을 가꾸고, 의료자치를 위해 노력하는 것, 인간간의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에 맞서 우정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실천하는 것 등 모두가 보이코트라고 할 수 있다.

 평생을 반전 평화와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했던 스코트 니어링은 죽으면서 ‘내 삶은 모두 실패했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자신이 평생 추구했던 이상은 실현은커녕 사태는 더 악화되어, 미국은 더욱더 제국주의적으로 나아갔고, 전쟁은 곳곳에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기의 삶은 행복했다고 말했다. ‘삶이란 끊임없는 열망이고, 분투노력이며, 그 속에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유토피아를 위해 우리가 늘 막연한 준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혁명에 몸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이 흔히 당장 할 수 있는 것조차 하지 않고 지내는 경향이 있다. 언제 올지 모르는 혁명에 대해 입으로만 말하고, 술집에서만 비분강개할 뿐이다. 3·1운동처럼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간디처럼 소금을 만들고, 물레를 돌리는 행동이 더 중요할 수 있다. 우리는 간디 식의 보이코트에 담겨있는 어마어마한 사상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경제학을 ‘음울한 과학(dismal science)’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경제학이 근본적으로 희소한 자원과 인간의 이기심을 기본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간디가 말했듯이 우리가 공생의 원칙 위에 삶을 꾸려나갈 때, 지구 자원은 무한히 풍부하다.

 녹색평론은 그동안 왜 우리가 ‘고르게 가난한’ 삶을 추구하지 않으면 안되는지 설명하려고 노력해왔다. 재화를 공정하게 고르게 나누면 우리의 삶은 얼마든지 풍요롭게 될 수 있다. 그리고 그것만이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길이기도 하다. 우리의 행복은 사회적 관계 속에서 나온다. 혼자만의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각성은 윤리적으로, 또 생태적으로 건강한 삶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출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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