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코소보에 와있는 이유

  • 등록일
    2005/08/17 19:47
  • 수정일
    2005/08/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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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5월 2일자 뉴욕타임스 매거진에 실린 수잔 손택의 '우리가 코소보에 와있는 이유'를 읽었다. 타인의 고통을 다 읽고 부록으로 딸린 4개의 글은 다음에 읽으려고 했지만, 최근에 유고슬라비아에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코소보 얘기를 읽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의 알바니아계 사람들을 대학살했다. 밀로셰비친지 뭔지 쳐죽일 악당 독재자더러 절대적인 악이라고 규정해도 당연하다. 그런데 손택은 그 절대적인 악을 쳐죽이자며 나토의 군사개입을 독려하고(이미 무차별 폭격이 시작된 이후인데도) 전쟁에의 개입에 반대하는 유럽의 평화주의자들을 호되게 꾸짖고 있다. 학살을 전쟁으로 막지 않으면 무엇으로 막을 수 있느냐고, 정당한 전쟁이란 존재한다고. 92년에 뉴욕타임스지에 발표된 미국의 나토를 통한 유럽질서에의 개입의 필요성이라는 정치적 이해관계따위는 전연 염두에도 없이 악을 자행하는 나라에는 인도주의적 응징이 가능하다라는 해괴한 논리. 도저히 학살을 목도할 수 없어서 나토군의 개입을 최후의 대안으로 선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미친 정권이 너무나 미친듯이 몇 만 명을 학살하고 있으니까. 그렇지만 그것을 인도주의적으로 정당한 전쟁이라고 부르다니 그렇다면 후세인에 대한 미국의 전쟁도 온당한 것이고 김정일도 전쟁으로 죽여 버려야 하고 미디어다음에 팔레스타인기사 씨리즈 나갔을 때 대다수 선량한 시민들의 반응처럼 유태인을 몰살시켜야 하는 것도 평화를 위해 당연한 일이 되는 거 아닌가. 정도의 차이에서 손택 당신은 거대한 정당성의 차이를 뽑아내기라도 한단 말인가. 나는 당신에게 분노한다. 유럽인의 마인드를 가진 미국인이나 할 수 있는 휴머니즘으로 가득찬 전쟁예찬.  당신은 평화를 사랑하는 자신의 일관성을 지키기 위해 모든 세르비아인의 살인을 부추겼다.

 

 

초특급으로 실망했을 뿐 아니라 팔이 저릴 정도로 분노를 느끼는 내가 잘못된 건가. 차선의 대안으로 자본주의의 정상화를 꾀하는 좌파들의 절박함을 우파라고 매도할 때의 그런 오독을 저지르고 있는 건가. 내가 대다수의 무기력한 평화주의자 흉내를 내고 있는 건가. 화를 주체할 수가 없다. 모두 다 내 오류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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