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고통

  • 등록일
    2005/08/19 10:52
  • 수정일
    2005/08/19 10:52
  • 분류

세계보도사진전같은 거 너무 싫다. 전쟁사진들 너무 싫다. 사진 속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나도 학대당하는 기분이다. 다른 사람의 고통을 이미지로 굳이 확인하지 않으면 그것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인간은 무딘 존재인가? 역시 그런 사진을 보는 것은 관음증인가?

 

나는 그런 사진들, 차라리 인간을 고깃덩어리로 묘사한 게 낫지 그들의 고통을 보라고 강요하는 사진들을 보면 미쳐버릴 것 같다. 그러니까 그런 사진을 안 보면 관심이 안 생기냐고. 오히려 그런 사진들을 보면 약간의 관음증적 쾌감과 공포, 연민의 뒤섞임을 경험한 채 금세 잊고 잘들 살지 않냐고.

 

수잔 손택은 내 생각을 구체화시킨 듯이 사진을 찍는(shot) 것은 총을 쏘는(shot) 것과 같다고 말한다. 오늘날 전쟁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이런 이미지들이 가져다주는 충격을 통해서 전쟁을 이해한다각종 전투와 대량학살이 가정에서 작은 화면으로 즐길 수 있는 오락거리의 일부가 되어버렸다고 비판한다. 버튼 하나만 누르면 미사일이 날라가듯이(원격 조정) 전쟁은 이미지를 통해 수행되고 텔레비젼은 전쟁을 이미지로 다룬다고.

 

그녀는 자신의 의견을 강력히 주장하지 않고 서서히 스며들듯이 조용하게 얘기한다. 그런 이미지들에 연민하지는 말라고. 연민은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해 줄 뿐이라고. 무기력해하지 말라고. 무기력감은 냉소, 무감각으로 이어진다고. 이미지는 전부도 아니고 부정해야만 할 어떤 것도 아니라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어줄 뿐이니 우리(우리가 누구인가라는 고통스러운 질문을 피해가지 않았다)가 누리는 것들이 어떤 식으로 타인의 고통을 전제로 하는지 타인의 고통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자고 얘기한다.

 

그렇지만 이미지가 서사를 지운다거나 인간성을 파괴한다는 비판을 그럴 수도 있다고 얘기하면서도 그에 대해 뾰족한 대답이 없어서 나의 의문은 풀리지 않는다. 개인을 지워버리고 서사를 지워버리고 대립되는 양측 아무나 이용할 수 있는 이미지를 굳이 긍정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리고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기 위한 시초로 반드시 그런 파괴적인 이미지가 필요한가?

 

나는 그런 끔찍한 현실들을 외면하겠다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아버지가 총알로부터 아들을 보호하려다 둘 다 숨진 그 장면때문이었다. 그렇지만 군인들이 팔레스타인 어린이의 팔을 떼어낸 그 사진을 봤을 때는 감각이 파괴되고 있었다. 우리가 감수성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오히려 무감각으로 단련되어가는 것을 경계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래서 손택이나 나나 너무 인간을 믿는 것은 아닌가 싶다. 나는 그런 파괴적 이미지와의 대면없이도, 손택은 대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코소보에 다녀와서 썼다는 이 책의 서문 마지막의 '정말'이라는 단어에 눈물이 났다. 정말 정말 절박해 보여서.

 

현실의 스펙터클화나 재현 등 보드리야르나 다른 사람에 대해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비난한 것은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스펙터클의 주체가 부자들에게 적용된다라는 말은 수긍이 가지만 그뿐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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