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오이 예찬

  야오이는 포르노+여자 역할을 남자가 한다는 데서 순정만화와 구분된다. 요새 야오이가 유행 추세라서 순정만화에도 포르노 강도가 약한 야오이 만화가 대거 등장하고 있다. 클리셰들 중 어떤 것들은 순정만화에 쓰이지 않는 것도 있다. 강간당한 뒤 남자 맛을 못 잊는 게 가장 대표적인 예다.(그러나 순정만화에도 어린 여자아이가 강간당하며 자신의 본능에 눈을 뜨는 거지같은 만화들이 수입되고 있음을 목격했다.) 장르적 특색으로는 씬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걸 꼽을 수 있겠다. 그 밖에는 잘 모르겠다.

 

  보통은 소비층이 여성이므로 여자들의 욕망에 충실하다,고 오해될 소지가 있지만 별로 그렇진 않다. 여자가 그리고 여자가 보는 포르노지만 남자를 위한 포르노와 전혀 차이가 없다. 그냥 여자의 자리에 남자만 갖다 놨을 뿐이다. 그것도 작고 연약하고 눈이 커다란 여자같은 남자로 공공연히 '여자'로 취급된다. 결국 여성의 욕망이란 강한 남자한테 하드하게 당하는 걸까? 자기가 당하고 싶은 그 자리에 다만 눈요기를 위해 남자를 갖다 놓은 걸까? 그러나 이 질문은 순정만화에도, 연애소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으로 거짓 욕망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길들여져 온 것이 슬프고 만들어진 욕망을 자신의 욕망이라고 그대로 믿고 있는 것이 안타깝기는 하다.

 

  강간 얘기를 좋아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성적 취향이 그렇다면, 남에게 고통을 주지 않고 혼자 상상하는 것은 뭐 아무려면 어떠랴. 하지만 상상을 만화로 그리고 소설로 연재해서 게재하고 책을 내어 타인과 공유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당연한 소리지만 강간 자체를 소재로 삼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여성역할 남자주인공은 만화 안에서 두들겨 맞으며 강간당하고, 그 폭력에 익숙해져서 작가에 의해 강간당하는 게 좋다고 은근히 강간당하길 기다리게 되고, 만화 밖에서 그걸 즐기는 여성 독자들에 의해 수 차례 강간을 당한다. 많은 작가가 결국은 강간범과 피해자가 사랑하게 되었다거나 알고보니 사랑하고 있었다고 되지도 않는 로맨스로 결말짓고, 이를 읽은 독자는 점점 강간씬을 즐기고, 찾고, 자신과 비슷한 취향의 사람을 만나 힘을 가진 세력으로 떠오르고, 이들의 높아지는 수준에 맞춰 강간전문 포르노 비디오 사업이 활성화되고, 자본가는 돈을 벌고, 헐벗은 남자들이 똥꾸멍을 뚫어서 옷을 사입는, 거대한 '시장'을 형성하고, 좀더 자극적으로, 좀더 아프게, 더럽게 강간을 상품화하게 되는 거대한 폭력의 굴레를 즐기는 것이 개인적 취향의 문제인가?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하며 야오이 '문화'를 즐기는 것이 괴로워졌고, 감수성을 잃지 말고, 남성과 나에게 폭력이 되지 않게 의식의 끈을 놓지지 않으며 보겠다는 자기합리화의 지경까지 이르렀다가 결국은 야오이 관련 싸이트들을 탈퇴하고 만화를 끊는 것으로 매듭을 지었다. 하지만 폭력적인 것이 어디 야오이의 특성이겠는가. 순정만화도 소년만화도 성인만화도 영화나 소설, 시에서까지 거짓말이나 갈겨 대고 그걸로 돈벌어 쳐먹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게다가 내가 좋아하는 작품들은 분명히 저런 폭력적인 것들이 아니다.

 

  단지 남자와 남자가 벌거벗고 뒹구는 것이 전부가 아니므로, 야오이의 주된 소비자라는 위치에서 벗어나 창조적인 수용자가 되고 싶어서 글들을 남긴다

 

 

 

 

 

=============================글 쓴지 몇 시간이 되얏다고,

뭐 뻥은 아니지만 아무튼 나도 요새 심각하게 내지는 비장하게 내지는 이성적으로 내지는 논리적으로 내지는 멋지게 내지는 구성력있게 내지는 비평조로 내지는 일관성 있게 내지는 새지 않고 내지는 멀쩡하게 글 쓰고 싶긴한데 닭살스러웁다 웁쓰

내가 뭐시간데? 그냥 하던대로 감상같지도 않은 헛소리나 남길테야>_< 그게 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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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친구??

  • 등록일
    2004/09/06 11:03
  • 수정일
    2004/09/06 11:03
  • 분류
    마우스일기

영화 <오아시스>에 대해 장애여성들이 항의를 했었다.

장애여성을 천사같은, 성녀같은 존재로 대상화시켜서였나? 그보다 극중에 문소리 씨가

성폭행 아니라고 자기 의사표명도 제대로 못하고 장애여성을 바보같이 그렸다고 그랬던 것

같다. 앞의 이유도 포함해서 봐도 되겠다.

 

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만약 어느 영화에서 은행원들의 비리를 신랄하게 비난한다면

은행원들이 들고 일어날까? 기분 나쁜 사람도 있겠지만 그냥 넘어갈 것이다.

문제는 장애인들이 세상과 소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장애인이든 여자든 각자의 개성이 다르고

그럼 사람도 있을 수 있는 건데 고작 그런 영화 한 편이 사람들의 장애인에 대한 인식에 영향을

줄 정도로 한국 사회에서 장애인들이 꽁꽁 숨겨져 있기 때문에, 그 영화 한 편으로 또다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 때문에 장애여성들이 반발한 것이다. 영화보다는 장애인에 대해

무지하고 폭력적인 사회의 탓이다.

 

내가 가진 생각 역시 엄청나게 폭력적이었다. 장애는 종류가 많은데도 장애인, 하면

조용하고 수줍고 따뜻하고 천사같고 용서해주고 뭐 그딴 거만 생각했었는데 저 영화를 보고

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화들짝 놀랐었다. 장애인 중에도 당연히 재수없는 사람 미친 것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면 장애인이라는 특정 '인종'이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천차만별인 장애의 차를 무시하고

'단일한 장애인'으로 묶어서 공통적으로 선량하고 따뜻하다고 생각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장애인을 내가 그렇게 인식하고 있었다는 데에 놀라고 곧바로 "장애우"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그 전에 "장애우"에 대해서 잘못된 표현이라는 글을 읽었었다. 장애인은 모두 친구다, 그들은

한 주체이기 보다 우리가 친구해 줘야 하는 한 "객체"이다!!! 라는 뜻이 표현된, "정상인"의

"비정상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포함된 그 단어!!!!!!!! 가 아직도 비일비재하게 쓰이는 것이

난감하다.

 

어떤 소외받는 집단, 계급, 계층에 연대할 때 그들을 몽땅 알지도 못하면서 "친구"랍시고

무슨무슨 "우"라고 붙이는 게 가당키나 한가? 예를 들어 지금도 인종차별로 고생하는 흑인을

"흑우"-_-라 부르고 인디언을 "인디우"라 부르고 이주노동자들을 "이주노동우"라 부르고

철거투쟁을 하는 빈민을 "빈우"라 부르고... 대략 황당한 이런 표현은 전혀 쓰이지 않는다.

그런데 왜 유독 장애인에 대해서만 장애우라 부르는 걸까??

그냥 어떤 대자보를 보고 생각나서 써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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