링구

 99년인지 00년인지 <링구>가 개봉할 당시는 수능이 끝나고 원서를 쓰던 때였다. 소설 링구 시리즈의 왕팬인 친구와 아직 링구는 안 봤으나 공포물 마니아였던 나는 의기투합하여 극장을 찾았다.
 당시 나는 내게 공포란 없다며 의기양양하였지만, 친구 손을 붙잡고 앉은 자리에서 뒷걸음을 치고 말았다. 그래서 대입 전에 원작 링구 세 권을 사서 읽고 감동을 두 배로 증폭시켰다. 영화를 본 다음날 학교에서 비디오로 한국판 링구를 보았는데 배두나 귀신은 완전 코미디였다. 일본판보다 한국판이 원작에 충실했다는 얘기와 달리 연기력 딸리는 배우들과 상상력 딸리는 제작자들은 씁쓸한 웃음만 남겨주었다. (참나 이따위 표현을 하다니... 재수없어 눼~~)
 그리고 서기 2천년 8월- 링구2가 개봉했다. 오랜만에 보는 공포물이라 몇 명 없는 극장에서 혼자 깩깩 소리를 질러대다 그게 웃겨 웃다가.. 정신없이 본 뒤 집에 와 영화내용을 곱씹어 보고 무서워서 울었다. 링구1에서 원작이랑 노선을 다르게 걷기 시작한 것이 링구2에서도 원작을 잇지 않고 영화의 노선을 따라 완전 다른 내용이 되버리지만(마이가 요이치를 살리다니!) 무척 무섭고 재밌었다.
 소설 링구 씨리즈의 비하인드 스토리, 링구0 역시 2천년 여름에 발간되었다. 1,2,3에서 미처 다 하지 못한 '여성들'의 얘기로 주인공 사다코를 비롯, 영화 2편에서 왕왕 왜곡된 마이와  제작 여부를 알 수 없던 링구 3편 LOOP의 레이코 얘기가 실려 있었다. 링구 3에 관한 궁금증은 그 다음 주에 영화 링구0을 보고 풀렸다. 링구0은 3가 설 자리를 완전 앗아가 버린 것이다!
 
 날짜도 오묘한 11월 11일- 고대하던 링구 라센이 개봉했다. 공포물의 특성을 살려 개봉 당일 심야 11시 상영을 택했다.
 이 작품에 관해서는 사전 지식이 없었다. 단지 <링구2>가 링구 오리지날인 영화를 이은 것인데 반해 이 작품은 원작에 충실한 것이란 정도. 역시, 영화는 링구 원작과 영화의 괴리를 메꾸느라 고심한 흔적이 여기저기 엿보인다(그래서 3편은 안전히 나올 수 있도록..이라 추측했었는데 먼저 나와버려서 링구3의 탄생을 막아버린 0가 밉다). 여자로 변신하여 다카야마와 아이까지 낳았던 기자 '아사카와'와 아들 '요이치'를 교통사고로 완전 없애고 비디오도 파기해 버린다. 앞으로 문제되는 감염로는 아사카와의 '사다코 추적 일기'. 이걸 읽기만 한 사람도 링구 바이러스에 걸려 목에 종양을 갖고 죽어 버린다. 죽음을 피하는 방법은 안도가 부지불식간에 저지른 '성관계를 통한 여인에게 전염시키기'이다. 마지막 비디오의 희생자가 될 뻔 했던 안도를 위로하느라 괜히 잤다가 사다코를 일주일만에 잉태·출산하고 황천 간 가엾은 마이가 그 최초의 희생자이다. 이제 바이러스는 링이란 ○ 모양에서 ∼°남성 정자로 변형되어 지구 여인네들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이른 것이다. 여기서 라센 자체로는 처음으로 원작과 어긋나는 일이 발생하는데 책에서 마이의 몸을 빌려 '사다코'가 태어난 것과 달리 마이의 몸에서 '사다코'가 '마이'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여기서 궁금점- 류지랑 연인이 돼버린 마이-사다코는 지구 정복(?)을 위해 감염 경로인 아사카와의 일지를 소설로 펴내려하는데 그걸 읽은 남자는 그냥 죽어버리고 읽은 여자(혹은 읽은 남자와 성관계를 가진 여자)는 자기 모습으로 사다코를 낳고 죽는다. 말하자면, 자기가 자기를 낳는데 영혼은 사다코인 것이다. 그럼 사다코는 한 명이고 이미 태어 났는데 다 같은 영혼을 지닐 수 있는 걸까? 자기를 낳은 여인의 기억까지 갖고 있다고 하니 사다코+마이같은 형태로 신인류가 등장하겠군.. 그럼 그 다음엔? 남자는 다 죽고 마이-사다코만 우글거리는 세상. 그들은 이제 소설을 읽어도 죽지도 않고. 그러다 자체 멸망할 텐데. 하긴, 그걸 막기 위해 SF소설인 링구 시리즈 완결편이 등장한 거겠지만. 여튼 사다코와 류지는 세계정복작업에 착수하고, 안도는 인류를 배반하고 얻은 아들과 류지가 그린 그림처럼 쓸쓸히 바닷가를 걸으며 이 영화는 끝난다.
 책보다 영화가 더 좋았던 이유는 원작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새로운 내용으로 전개되고 1편의 TV에서 귀신이 병신춤(오오 공옥진 여사의 완벽한 전승자여!)을 추며 슬로우로 기어나오는 장면과 2편의 마이를 쫓아 우물에서 기어올라오는 가면(?) 쓴 사다코가 너무 무서워서였다. 라센 역시 실망시키지 않고 드디어 등장한 인간 사다코가 비디오 보던 안도를 덮쳐 혀로 핥는 장면으로 다시금 나를 공포의 올가미로 옭아맸다. 덧붙이자면 링구 0에선 3편의 사다코가 아닌 다른 예쁜 사다코가 등장하는데(못생겨서 짤렸나보다) 그 예쁜 여자는 공주같은 흰 드레스를 입고 각기춤(!)을 추는 기염을 토해낸다. 아아- 한동안 나는 각기춤을 추며 그녀 생각을 하며 공포에 떨곤 했다.
 내용도 어느 평이 말했듯이 단순히 깜짝 놀라는 피칠갑 단순 공포 영화가 아니라 뼛속까지 저려올 정도의 인간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었다. 책에서 잘 몰랐던, 그래서 무분별하다고 느꼈던 사다코의 저주는 그녀도 단순한 인간이며 그래서 우물에 빠져서 너무 무서웠구나하고 이해되었다. 자기가 느낀 공포를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는 그녀가 불쌍하기까지 했다.
 사다코는 1편에서 흰 눈알과 다리만 나오고 2편에선 가면을 쓰고 나왔는데 3편에선 드디어 얼굴이 나왔다. 경력을 보니 신인인 듯 하다. 책에선 뭐, 거의 천상의 미모쯤으로 묘사했는데 왕무섭게 생겼을 뿐 그닥 이쁘진 않았다. 이미 언급한 바, 무섭기만 하고 못생긴 탓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링구 0에선 교체된다...
 그리고 사다코의 과거나 우물 속으로 안도가 빨려들어가는 장면을 흑백의 비내리는 필름으로 찍어서 분위기가 더 좋았다.
 음- 생각건대 사다코가 자기 아닌 남의 모습으로 태어나는 것은 아무래도 마이가 이뻐서가 아닐까 싶다. 머리 넘긴 모습이 정말 이뻤다. 아, 그리고 사다코는 양성인간이 아니었다. 이 점 때문에 책과 다른 점들이 종종 생겼다.
 무서워서 처음 류지 내장 갈린 장면 뒤 영화 상영 내내 쭈그리고 있다가 이내 잠들었으나 끝까지 자리를 지켜 준 고마운 승원에게 이 조악한(!) 감상문을 바칩니다..

 

 

 사족--- 최근 꿈에 링구 3가 나올 수 없음에도 나와 버렸다! 영화는 훌륭했고 난 감탄했다. 아! 기억이 난다면 좋으련만! 요샌 링구를 거의 잊고 있었는데 나의 잠재의식은 잊지 않은 모양이다. 공포는 습득된 것이 아니고 선천적인 감정이다. 공포감으로만 느낄 수 있는 그 짜릿함이 좋다. 너무 무섭기도 하지만. 링구를 보고 나와 같은 감정을 느낀 사람들만 이해할 수 있는 조악한 시를 실어 본다.

 

 

  링구!
  -만물편재(萬物遍在)*

 

 

 머리를 감을 때도
 울고 있을 때도
 집에 돌아갈 때도
 밥을 먹을 때도
 공부할 때도
 세탁기 안을 들여다 볼 때도

 

 버스 안에도
 전철 안에도
 우리 집에도
 내 방에도
 거울 속에도

 

 사다코.. 사다코..
 사다코......

 

 

 

 *편재 : 널리 존재함. 두루 퍼져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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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쓴 거라지만 읽기조차 싫다-_- 읽다 때려쳤다. 그냥 거지같은 글들도 열심히

옮겨 오는 이유는(이라지만 많이 사라지고 있다만) 세상에 존재했다 사라지는 게 너무 싫어서.

그 너무 싫음을 능가할 만한 거지들은 다 버려야 했지만 ㅋ

뒷 씨리즈 링구는 거의 기억이 안 난다. 첫 링구는 티비에서 다시 보려고 했지만 너무 무서워서

마루에서 보다가 무서울라치면 방에 뛰어들어왔다가 다시 나갔다가 그러다가 결국

사다코 우물에서 나오는 장면에서는 방에 눌러앉아 버렸다. 티비 끄러 나가기도 무서워서.

내가 태어나서 본 공포영화 장면 중에 단연 가장 무서운 장면이다. 사다코 우물에서 기어나오는

거. 어떤 공포도 이걸 능가하지 못하리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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