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아빠가 노인이라니...

  • 등록일
    2017/01/13 17:56
  • 수정일
    2017/01/13 18:10
  • 분류
    마우스일기

홍콩 갔다와서 아빰 보러 갔더니 삼겹살을 구워 주시며 내내 아프다고 너무 아프다고 몇 점 드시지도 못 했다. 통풍으로도 고생하셨었지만 이렇게 아파하시는 건 처음 봤다. 병원 가자니깐 그 아픈 와중에도 정색하시며 의사놈들은 전부 다 도둑놈들이라고 언니한테 아빠 피 빼달라며, 과거에 의사도 못 고친 지병을 아빠가 자가치유-_-했던 걸 자랑스레 얘기해 주셨다. 몸에 두드러기 같은 게 돋았는데 허리까지 너무 아파서 근데 디스크 통증은 아닌 것 같고, 통풍 증상도 아닌 것 같고 예전에 한 번 앓았던 신경통 같다고 하시며 자가치유를 고집하셨는데.. 며칠 앓다 도저히 안 되겠던지 새벽에 언니랑 응급실에 가셨는데 진료받고 나서도 의사놈들 도둑놈들이라고 욕을 욕을 하셨다고 ㅋㅋㅋㅋ -_- 당일에도 내가 검색해 보니 대상포진일 수 있단 결과가 있었는데, 그거란다. 수두를 앓았던 사람에게 바이러스가 잠복해 있다가 주로 60대 이후에 대상포진으로 발병한다는데... 의사가 잘 먹고 잘 쉬라는데, 아빰은 이미 잘 먹고 잘 쉬고 있다며, 왜 이런 병에 걸렸지? 의문을 표하시는 데다 대고 검색해보니 노인성 질환이란 말을 할 수 없었다. 아빠는 또래 다른 사람들보다 건강하시고 운동도 하고 생활 환경도 좋고.. 굳이 병에 걸릴 이유가 있다면 그냥 나이가 들어서 면역력이 약해져서이다. 아빰이 늙으셔서 그래요, 하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사실 우리 아빠가 노인이란 건 나에게도 충격이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외)할머니는 할머니였고(겨우 50대셨지만...), 내가 노인이란 일반명사에서 떠올리는 것도 우리 할머니다. 몇 년 전부터 아빠가 많이 늙으셨구나, 깨닫고는 있었지만, 우리 아빠가 그냥 '노인'이라고, 우리 할머니보다 젊어도 노인이라고는 인식하지 못 했다. 말했듯 아빠는 건강하신 편이기도 하고, 우리 아빠는 그냥 우리 아빠니깐. 내가 나이 드는 걸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우리 아빠가 나이 드는 건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못 했다. 20대까지는 죽는다는 게 너무 두려워서, 노화는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어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혐오가 노화에 대해서도 고스란히 있었다. 그런데 나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어느 정도 극복하면서 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구체적으로 우리 아빠의 노화를 접하니까 혹시 내가 여전히 노화를 혐오하고 있는 건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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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도 아니면서 이런 모자를 쓰냐며 쥬쥬 모자를 써보신 최근의 우리 아빰.. 귀요미

 

대상포진이 그렇게 아프다는데 일주일을 참으시다니 어휴... 정말 살아온 세월이란 게 정말... 정말 무서운 거구나. 의사에 대한 강력한 불신도 그렇지만, 한국 전쟁 이후 어린 시절을 겪은 아빠는 헛돈 쓰는 걸 정말 너무너무 싫어하신다. 그런데 대상포진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아빠를 오랜만에 만나 또 박근혜 얘기나 하고 아빠를 고통스럽게-_- 만들었네. 집에 와서는 아픈 아빠가 걱정되기보다 왜애애애 우리 아빠가 아직도 박근혜를 지지하는 그 4프로인 거신가 ㅁ이에게 푸념만 했다. 그렇게 오래 아팠고 참았는 줄 몰랐다. 그 아픈 와중에도 박근혜 자체라기보다, '빨갱이'라는 박근혜 반대 세력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암울하게 하는 게 너무 걱정되셔서, 딸에게 카톡으로 거지 같고 근거 없는 선동글 보내시고, 아빠는 이렇게 죽어도 상관 없는데 너희들 미래가 너무 걱정이라고 집회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가서 헌법재판소에 탄핵 기각하라고 요구하고 싶다고 하시고 ㅠㅠㅠㅠㅠㅠㅠㅠ 아오 사실 이 때는 아빠 병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냥 아 그 태극기 든 노인 행렬에 우리 아빠가 참여한다니 왜 뭐땀시 왜 때문에에에에 우리 아빠가 그런 노인인 거냐 속으로 절규하고 집에 와서 절규했는데... 아니 그리고 막 비논리적이라고 막 따졌음 ㅠㅠㅠㅠ 아빠.... 여담으로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이.. 우리 아빤 절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닌데 왜 저렇게 티비조선마저 빨갱이라고 하며 괴담을 철썩 같이 믿고 계신 걸까 계속 의아했는데, 그 괴담 유포자들이 빨갱이, 적화통일에 대한 오랜 공포를 자극하고 있단 걸 알게 됐다. 아빠는 진심으로, 이러한 국난-_- 속에 이 나라가 북괴들의 손에 넘어갈 수 있다고, 민주당이든 검찰이든 곳곳에 빨갱이가 잠입해 있어서 나라가 위태롭다고 믿고 계신다. 이 나라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그 공포심은 오랜 기간 주입된 반공사상이 끊임 없이 자극되고 현재화된 결과다. 그런 걸 첨으로 알게 됐다.

 

나는 내가 잘 늙는 것만 고민했었는데, 정말 이기적이었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아빠가 자꾸 나를 보고 싶어하시고, 몇 년 전까진 니네 집에 빨리 가버려라~ 그런 태도였는데 이젠 더 늦게까지 있거나 자고 가길 바라시고, 빨갱이-_- 운운하는 것도 예전처럼 내게 공격적이진 않으시고, 이걸 슬프다고 치부하지 말고 자연스러운 거라고, 아빠가 아프신 것도 내가 신경써야 하는 것도 원래 그런 거라고, 내가 좀 이치를 빨리 받아드렸으면 좋겄다.. 그리고 오래 전부터 아빠가 내 사상을 바꿀 수 없듯이 그 역도 마찬가지야..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아빠랑 있으면 참지 못 하고 -_- 아빠는 틀렸어요! 아빠 얘긴 다 잘못 됐어요! 싸우고 말았는데 뭔가 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내가 내 나이듦을 긍정하는 것과 아빠의 나이듦을 긍정하는 건 또 다른 문제 같기도 하다. 어렵다. 진인옥 여사나 보러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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