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타스틱 플래닛(Planète sauvage, La, 1973)

 

방금 날파리를 자연스럽게 죽였다. 나는 작은 곤충은 죽여도 된다는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실현하고 있다. 거부감이 없는 것도 아니다. 항상 의문스럽다. 왜 작은 곤충은 막 죽여도 될까? 그렇지만 죽이는 순간에 그러한 의문을 가지고 있는데도 아무렇지 않게 죽여 버리고 만다.

 

나를 말한다면 별로 곤충을 많이 죽이는 편은 아니다. 특히 모기의 경우 왠만하면 놔둔다. 그렇지만 얘네들은 정도를 모른다. 너댓 번 빨았으면 좀 사라지지 잠을 설칠 정도로 물어댄다. 그러면 일어나등가 해서 잡아 죽일 수밖에 없다. 그렇게 관대한 나라는 인간이지만 그 '정도'라는 건 내가 설정해 놓은 거다. 모기랑 협의해서 정한 게 아니다.

 

마치 자본가가 노동자를 대하는 것 같지 않은가. 지들 분수를 모른다고 하는 것보다 더 심하지 않은가. 죽여 버리기까지 하다니. 많은 사람들이 동물을 참으로 사랑한다. 나는 누군가 코끼리를 먹는다고 하면 거부감이 든다. 개나 고양이 그렇게 예쁜 동물들 말고도 동물원에 사는 그런 동물들에게 위해가 가해지면 몹시 기분 나쁘다. 그건 아주 작은 쥐같은 동물도 형체를 띤 것이 나-인간과 비슷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곤충으로 말하자면 도대체 같은 생명체라는 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사성이 없다.

 

그건 바다 생물들이 백 배 심하긴 하지만.. 도대체 말미잘이랑 나랑 어디를 봐서 생명이라고 묶을만 한가!! 도대체 해파리나 산호같은 애들은 뭐란 말인가. 종의 차원이 다르다. 그냥 분류된다는 게 아니라 정말 차원이 완전 다르다. 도저히 접점이 안 보인다.

 

아무튼 대부분의 곤충들, 특히 집에서 마구 잡아 죽이는 곤충들은 나와 유사성이 없는 것을 너머 크기가 대빵 작아서 도저히 나의 존엄성 반경 천 킬로미터 내에 들어오질 않는다. 개미를 꾹 눌러죽이면 내 손에 나름대로 개미의 시체가 묻어 있겠지. 그러나 개의치 않고 손도 안 씻고 이것저것 먹는다.

 

왠 변태같은 짓인가 싶지만 나는 아주아주 자주 곤충과 나의 크기 비율에 상응하는 거대한 존재가 인간을 꾹 눌러죽이고 손에 피나 내장이 묻은 채로 거대한 쿠키같은 걸 먹는 걸 상상한다. 걔네들한테는 피나 내장, 장에서 쏟아져나온 똥같은 게 느껴지지 않는다. 그 경우 인간인 나로서는 그 거대한 존재를 증오하고 야만적이라고 느낄 수밖에 없다.

 

판타스틱 플래닛, 영제로는 Savage Palanet인 이 영화는 내 가학적인 상상을 옮겨 놓았다. 마치 인디언이나 흑인이 인간인가?로 심하게 토론한 근대 유럽인들처럼 거대한 존재들은 인간들이 지능이 있는가를 토론하고 없다고 결론짓고 쪼끔 똑똑한 동물 대하듯이 한다. 그리고 우리가 바퀴벌레 더럽다고 하듯이 인간들 더럽다고, 우리가 바퀴벌레 번식력 강하다고 하듯이 인간들 오래 살지도 못하면서 번식력을 엄청 좋다고 말한다. 곤충에 비해 인간이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을 살 듯 이 거대한 존재들은 매우 오래 산다.

 

그리고 여차저차 해서 결말에 박해받던 인간들이 거대한 존재들의 약점을 알아내고 마구 공격해 거대한 존재와 인간은 평화협정을 맺고 어울려 살아가게 된다. 영화를 본 직후에는 결말이 대빵 별로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결국 서로 약점을 잡고 타협하지 않는 이상 화해란 불가능하다는 얘기가 아닌가 싶다. 대단히 비관적이면서 현실적이라서 동의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렇게 생각햄.

 

내가 세상의 가운데에 있고 내 주위로 원을 그린다. 나로부터 멀리 있을수록 유사성이 떨어지는 존재들이다. 원 밖의 존재들은 당최 나에게 유사성을 느낄 수 없는데 존중해야 하나? 존중해야 한다면 왜지? 궁금할 뿐이다. 그렇지만 누군가 쳐놓은 원안에는 내가 없을 거란 생각이 든다. 누가 쳐놓은 원안에는 내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원의 크기가 다르니까. 그래서 원이 얼마만큼 큰가보다는 원이 없는 게 더 훌륭한(?) 자세일 듯... 하지만 원을 없앤다는 게 도대체 가능하기나 한 건가? 차선책은 역시 원이 있다는 걸 인정하고 그 원밖에 있어도 그거 무시하지 않는 거, 내 원이 작다는 걸 인정하는 거. 근데 그것도 별로..

 

여러가지 생각이 더 들지만 대충 의문만 가득하고 당최 여물지를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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